솔직히 저는 한동안 중국 추격론을 꽤 진지하게 믿었습니다. BOE가 삼성을 매출로 앞지른 해가 2017년이었고, CATL이 배터리 출하량 1위를 찍은 게 2018년이었으니까요. 뉴스만 보면 한국 산업이 하나씩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2025년 현재 실제로 벌어진 일을 들여다보니, 제가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술을 훔치는 데 성공했는데도 왜 실패하는지, 그 이유가 생각보다 훨씬 구조적이었습니다.

중국 제조 2025, 처음부터 한국이 표적이었다
2015년 리커창 총리가 서명한 '중국 제조 2025' 문서에는 10개의 목표 산업이 적혀 있었습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조선, 로봇, 항공, 신재생에너지, 바이오, 신소재, 첨단 기계. 제가 이 목록을 처음 봤을 때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10개 중 7개가 한국이 세계 1위 혹은 2위를 달리는 분야였거든요.
이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은 너무 크고, 독일은 EU가 감싸고, 일본은 이미 잃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기술 수준은 세계 최고지만 나라 규모는 중간이고, 시장은 열려 있는 한국이 가장 공략하기 좋은 대상이었던 겁니다.
방식은 세 단계로 진행됐습니다. 먼저 기술 획득 단계에서는 엔지니어를 빼내거나 설계 도면을 유출하는 방식이 동원됐습니다. 실제로 2020년에는 LG 디스플레이 임원이 도면 파일을 들고 중국으로 넘어가다 적발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음은 국가 보조금 투입이었습니다. 반도체 분야에만 3천억 위안, 우리 돈으로 약 55조 원이 쏟아졌습니다(출처: 자본시장연구원). 배터리와 디스플레이까지 합치면 200조 원이 넘습니다. 마지막 단계는 원가 이하 덤핑이었습니다. 국가가 손실을 메워주니 3년이고 5년이고 버틸 수 있었죠.
처음 몇 년은 이 계획이 먹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겪어보니, 숫자만 보면 이기는 것 같아도 실제 시장에서 통하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였습니다.
- 기술 획득: 엔지니어 스카우트, 설계 도면 유출, 기업 인수 등 다각적 방식 동원
- 국가 보조금: 반도체·배터리·디스플레이 합산 200조 원 이상 투입
- 덤핑 전략: 원가 이하 판매로 한국 기업 시장 점유율 압박
다섯 회사가 무너진 진짜 이유
BOE는 OLED 패널 분야에서 삼성 디스플레이를 넘보며 애플 공급망에 진입했습니다. 여기서 OLED란 유기발광다이오드(Organic Light-Emitting Diode)를 의미하는데, 백라이트 없이 각 픽셀이 스스로 빛을 내는 방식이라 색 표현력과 명암비가 월등히 뛰어난 디스플레이 기술입니다. BOE는 이 기술의 설계도를 확보하고 청두에 8조 6천억 원 규모의 B11 라인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2023년 애플이 조용히 주문을 줄이기 시작했고, 결국 아이폰 15 라인에서 BOE를 완전히 배제했습니다. 번인 문제도 있었지만 더 결정적인 건 신뢰 위반이었습니다. BOE가 애플 몰래 패널 설계를 임의로 변경했던 것입니다. 2025년 3월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 판결에서 BOE는 완패했고 미국 내 OLED 수입 금지 명령을 받았습니다.
CATL의 사례도 비슷한 패턴을 보입니다. CATL은 중국 내수 전기차 시장을 발판 삼아 출하량 세계 1위에 올랐지만, 주력 제품인 LFP 배터리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LFP란 리튬인산철(Lithium Iron Phosphate) 배터리로, 여기서 LFP 배터리란 안전성이 높고 가격이 저렴하지만 에너지 밀도가 낮아 프리미엄 전기차에 적용하기 어려운 방식을 말합니다. 반면 NCM 배터리, 즉 니켈·코발트·망간을 조합한 고성능 배터리는 CATL이 아직 한국 수준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 IRA 규제까지 겹치면서 포드는 LG에너지솔루션으로, 스텔란티스와 BMW도 한국 배터리로 돌아섰습니다. CATL은 2025년 1분기 창사 이래 처음으로 영업 손실을 기록했습니다(출처: 산업통상자원부).
조선 분야의 CSSC는 카타르 LNG 운반선 발주에서 결정적으로 무너졌습니다. 150척, 100조 원 규모의 세기의 발주였는데, 가격은 CSSC가 20% 저렴했음에도 카타르는 전량을 한국에 맡겼습니다. 핵심 이유는 멤브레인 탱크였습니다. 멤브레인 탱크란 영하 163도의 액화천연가스(LNG)를 안전하게 담기 위한 특수 격납 구조물로, 제작 기술을 보유한 나라가 세계에 한국과 프랑스 두 곳뿐입니다. 중국은 30년 넘게 개발했지만 시험 제작 과정에서 미세 균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화장품 분야에서 퍼펙트 다이어리는 K뷰티 히트 제품의 성분표를 그대로 복제하고 반값에 판매하는 전략을 썼습니다. 처음엔 미국 아마존에서 매출이 폭발했지만 2년 만에 역전됩니다. 미국 10대들이 코스알엑스, 조선미녀, 아누아를 선택한 이유는 성분이 아니라 BTS와 블랙핑크, 한국 드라마가 만들어낸 이미지 때문이었습니다. 성분표는 훔칠 수 있어도 문화적 맥락은 훔칠 수 없었던 겁니다. 2024년 12월 퍼펙트 다이어리 주가는 상장 최고점 대비 95% 폭락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반도체의 CXMT(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는 2023년 자체 D램 양산 성공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뉴스를 보면서 뭔가 어긋난 느낌이 들었습니다. CXMT가 만든 건 DDR4였습니다. DDR4란 2014년에 표준화된 구세대 메모리 규격으로, 이미 시장은 DDR5로 넘어갔고 AI 반도체 시장은 HBM으로 재편됐습니다. HBM이란 고대역폭 메모리(High Bandwidth Memory)로, 여기서 HBM이란 여러 층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연결한 구조로 AI 연산에 필수적인 초고속 메모리를 의미합니다. HBM 제조에는 EUV 노광 장비가 필요한데, 이 장비를 만드는 회사는 네덜란드의 ASML 단 하나뿐이고 미국은 2023년부터 ASML의 대중국 EUV 수출을 완전히 차단했습니다. CXMT는 공장은 열었지만 핵심 무기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 사이 SK하이닉스는 HBM 시장의 62%를 장악했고, 엔비디아 젠슨 황이 직접 서울을 찾아 HBM3 공급을 요청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세 가지, 그리고 앞으로 30년
영상을 보고 나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만든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었습니다. 기술은 훔쳤고, 돈은 충분했고, 인재도 데려갔는데 왜 다 무너졌는가. 일본은 독일 기술을 훔쳐서 성공했고, 한국은 일본 기술을 훔쳐서 성공했는데, 중국만 유독 실패한 이유가 뭔가.
제가 내린 결론은 중국이 훔친 건 기술의 표면이었고, 진짜 경쟁력은 그 아래에 있었다는 겁니다.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는 산업 생태계입니다. 삼성 디스플레이 아산 공장 반경 30km 안에는 400개가 넘는 부품 협력사가 있습니다. 유리 기판, 편광판, 드라이버 IC, 봉지재, 특수 세정 화학품까지 수십 년을 같이 성장해온 회사들이죠. 삼성이 부품 하나가 필요하다고 하면 다음 날 시제품이 나옵니다. BOE 청두 공장 주변엔 뭐가 있었을까요. 처음엔 논밭이었습니다. 도면 하나를 훔쳐도 그 도면이 실제로 구현되는 데 필요한 나머지 수백 가지 요소가 없으면 번인이 생기는 게 당연합니다. 생태계는 30년이 걸립니다. 돈으로 압축되지 않습니다.
둘째는 신뢰 자산입니다. 포드 임원이 사석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LG는 30년을 같이 일해서 우리가 뭘 원하는지 말 안 해도 압니다. CATL은 매번 통역이 필요해요." 솔직히 이 말이 제 생각보다 훨씬 깊이 와 닿았습니다. 카타르가 가격이 20% 더 비싼 한국 조선소를 고른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이 배가 앞으로 40년 동안 LNG를 옮길 배"인데, 그 40년을 책임질 수 있는 신뢰가 없으면 선택할 수 없었던 겁니다. 한국 조선업은 지금까지 LNG 운반선 사고를 낸 적이 없습니다. 이건 숫자로 사는 게 아닙니다.
셋째는 국가 브랜드입니다. 저는 예전에 드라마나 K팝이 산업 경쟁력이랑 무슨 상관인가 하고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직접 관련 사례들을 들여다보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미국 소비자가 코스알엑스를 사는 건 세럼을 사는 게 아닙니다. BTS가 화장하는 이미지, 제니가 바르는 립스틱의 이미지, 넷플릭스 상위권을 채우는 한국 드라마의 이미지가 한꺼번에 따라옵니다. 기아자동차가 미국에서 팔리는 것도 관세 이전에 국가 브랜드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퍼펙트 다이어리는 성분표는 카피했지만 이 이미지는 카피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이 분석을 그대로 일반화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태양광, 전기차, 드론 분야에서 중국이 실질적인 세계 경쟁력을 갖춘 건 사실이고, 산업별로 상황은 다르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주목한 건 다섯 가지 핵심 산업에서 동시에 비슷한 패턴이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기술과 자본은 이전됐지만 생태계·신뢰·이미지는 이전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이 세 가지는 시간이 갈수록 두꺼워질 겁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2025년 합산 영업이익 전망이 90조 원을 넘는다는 건 그 방향을 잘 보여줍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BOE는 지금도 아이폰에 납품하고 있나요?
A. 2025년 기준으로 BOE는 아이폰 17 프리미엄 라인에서는 완전히 배제된 상태입니다. 일부 저가 모델에만 제한적으로 남아 있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시각입니다. 거기에 더해 2025년 3월 미국 ITC 판결로 미국 내 OLED 수입 금지 명령까지 받은 상황이라 상황이 더 어렵습니다.
Q. CATL 배터리가 한국 배터리보다 무조건 나쁜 건가요?
A.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CATL의 LFP 배터리는 안전성이 높고 가격이 저렴해서 중국 내수 전기차나 에너지 저장 장치 분야에서 강점을 가집니다. 다만 프리미엄 전기차에 필요한 NCM 고에너지 밀도 배터리 분야에서 아직 한국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고, 미국 IRA 규제라는 지정학적 변수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Q. HBM이 왜 중국이 못 만드는 핵심인가요?
A. HBM(고대역폭 메모리)은 D램을 수직으로 여러 층 쌓아 연결하는 구조라 제조 공정 난도가 일반 D램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습니다. 여기에 EUV 노광 장비가 필수인데, 이 장비는 ASML이 독점 제조하고 있고 미국이 2023년부터 대중국 수출을 완전히 막았습니다. 장비가 없으니 아무리 설계도가 있어도 생산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Q. K뷰티가 미국에서 잘 팔리는 게 정말 드라마·음악 덕분인가요?
A. 물론 성분과 효능이 기본입니다. 그런데 퍼펙트 다이어리처럼 성분표를 거의 동일하게 복제한 제품도 시장에서 밀렸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소비자 조사를 보면 미국 젊은 층이 K뷰티 제품을 구매할 때 '한국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호기심'이 주요 동기 중 하나로 꼽힌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성분이 같아도 브랜드 배경이 다르면 선택이 달라지는 겁니다.
결론
이번 사례들을 정리하면서 제가 가장 크게 느낀 건, 산업 경쟁력이라는 게 공장과 도면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쌓인 협력사 생태계, 한 번도 납기를 어기지 않으며 만들어 온 거래 신뢰, 그리고 드라마와 음악이 켜켜이 쌓아 올린 국가 브랜드. 이 세 가지는 투자 규모로 사거나 단기간에 복제할 수 없는 자산입니다.
물론 현재의 경쟁력에 안주할 이유는 없습니다. 중국이 특정 분야에서 실질적 경쟁력을 키우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고, 기술 탈취 시도도 계속될 겁니다. 제 생각엔 지금 한국이 해야 할 일은 이미 쌓인 세 가지 자산을 지키면서 동시에 연구개발과 인재 양성, 그리고 K콘텐츠 산업에 꾸준히 투자하는 것입니다. 위기를 과장할 필요도 없고, 낙관에만 기댈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30년 동안 해왔던 것처럼 하루 더 쌓아 나가면 됩니다.